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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색슨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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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5세기부터 1066년 노르만 정복 이전까지 잉글랜드에 존재했던 시기를 지칭한다. 이 시기 잉글랜드는 로마 제국 붕괴 이후 게르만족의 이주와 정착으로 시작되었으며, 앵글족, 색슨족, 쥬트족 등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이 브리튼 섬에 정착하여 여러 왕국들을 형성했다. 9세기에는 웨섹스 왕국이 부상하여 잉글랜드를 통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알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앵글로색슨 문화를 발전시켰다. 10세기에는 잉글랜드가 통일 왕국으로 발전했지만, 11세기에는 덴마크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결국 1066년 노르만 왕조에 의해 멸망하면서 앵글로색슨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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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지도 정보
540년경의 브리튼. 앵글로색슨 왕국 이름은 빨간색으로 표시됨. 브리튼 왕국 이름은 검은색으로 표시됨.
540년경의 브리튼. 앵글로색슨 왕국 이름은 빨간색으로 표시됨. 브리튼 왕국 이름은 검은색으로 표시됨.
기본 정보
일반 명칭앵글로색슨 잉글랜드
통상적인 긴 명칭브리타니아
작은 글씨: (410년–449년경)
헵타키
작은 글씨: (449년경–927년)
잉글랜드 왕국
작은 글씨: (927년–1066년)
데모님앵글로색슨, 앵글, 색슨
시작 사건로마 속주 포기
시작 연도410년
두 번째 사건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정착 시작
두 번째 날짜449년경
세 번째 사건앵글족, 색슨족, 데인족의 통일
세 번째 날짜927년경
종료 연도1066년
종료 사건노르만 정복
공용어고대 영어
역사
주요 사건로마 속주 포기 (410년)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정착 시작 (449년경)
앵글족, 색슨족, 데인족의 통일 (927년경)
노르만 정복 (1066년)
추가 정보
관련 역사잉글랜드의 역사

2. 용어

Anglo-Saxon영어이라는 용어는 8세기경(아마도 파울루스 디아코누스(Paul the Deacon)에 의해)에 영국 색슨족을 대륙 색슨족(앵글로색슨어: Ealdseaxan, '옛' 색슨족)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다(Bede)는 731년경에 그의 저서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la》(영어: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를 완성했다. 따라서 당시 영국인(라틴어: gens Anglorum, 앵글로색슨어: Angelcynn)이라는 용어는 영국에 있는 게르만 부족들을 유럽 대륙(북부 독일의 구색슨족)의 게르만 부족들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2]

3. 역사적 배경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 로마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브리타니아에서의 로마 지배도 종식되었다. 406년, 콘스탄티누스 3세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부터 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브리타니아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를 철수시켰다.[6][7] 이로 인해 로마-브리튼 지도자들은 픽트족의 해상 습격 등 안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8]

이에 로마-브리튼 지도자들은 앵글로색슨 용병(foederati|포에데라티la)에게 영토를 할양하고 도움을 요청했다.[8][9] 그러나 442년경, 앵글로색슨족은 봉급 문제로 반란을 일으켰다.[10] 브리튼인들의 신음이라는 문서를 통해 서로마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호노리우스 황제는 브리튼인들에게 스스로 방어할 것을 지시했다.[11][12][13][14] 이후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에 전투가 이어졌고, 약 500년경 바돈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이 승리하며 앵글로색슨족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16]

9세기 초부터 웨식스가 앵글로색슨 소왕국들에 대한 종주권을 장악했지만, 데인인의 침입으로 웨식스를 제외한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멸망했다. 잉글랜드는 데인로(Danelaw)를 중심으로 하는 데인인과 서남부 웨식스 왕국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앨프레드 대왕 이후 앵글로색슨족은 점차 데인인 지역을 회복했고, 애설스턴 왕 때 처음으로 전 잉글랜드 왕으로 불렸다. 에드거 왕 때는 데인로 지역 데인인에게 자치를 인정했지만, 잉글랜드 왕국의 일원임을 서약하게 하여 앵글로색슨인과 데인인의 융합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의 습격이 다시 격렬해졌고, 1066년 노르만 정복을 거쳐 오늘날 잉글랜드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3. 1. 로마 제국의 쇠퇴와 브리타니아

브리타니아의 로마 점령이 끝나갈 무렵, 콘스탄티누스 3세는 406년 12월 라인 강 도하와 함께 게르만족의 침입으로부터 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남은 군대를 철수시켰다.[6][7] 로마-브리튼 지도자들은 특히 동부 영국 해안의 픽트족으로부터 해상 습격이 증가하는 심각한 안보 문제에 직면했다.[8] 이들은 앵글로색슨 용병(foederati|포에데라티la)에게 영토를 할양하고 도움을 요청했다.[8][9] 약 442년에 앵글로색슨족은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10] 로마-브리튼족은 서로마 제국의 아이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브리튼인들의 신음''이라는 문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410년경 브리튼의 civitas|키비타스la에 스스로 방어할 것을 지시하는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11][12][13][14] 그 후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에 수년간의 전투가 이어졌다.[15] 이 전투는 약 500년경 바돈 산 전투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브리튼인은 앵글로색슨족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16]

3. 2. 앵글로색슨족의 초기 이주

브리타니아의 로마 지배가 끝나갈 무렵, 콘스탄티누스 3세는 406년 12월 라인 강 도하와 함께 게르만족의 침입으로부터 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남은 군대를 철수시켰다.[6][7] 로마-브리튼 지도자들은 특히 동부 영국 해안의 픽트족으로부터 해상 습격이 증가하는 심각한 안보 문제에 직면했다.[8] 이들은 앵글로색슨 용병(foederati|푀데라티la)에게 영토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했다.[8][9]

약 442년에 앵글로색슨족은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10] 로마-브리튼족은 서로마 제국의 로마 사령관 마기스터 밀리툼 아이티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브리튼인들의 신음''이라는 문서),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410년경 브리튼의 civitas|키비타스la에 스스로 방어할 것을 지시하는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원조는 없었다.[11][12][13][14] 그 후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에 수년간의 전투가 이어졌다.[15] 전투는 약 500년경 바돈 산 전투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브리튼인은 앵글로색슨족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16]

로마 제국 멸망 이전부터 게르만족의 브리튼 침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17] 최초의 게르만족 방문객들은 기원후 43년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최초의 침략군에 속한 제14군단에 배속된 8개의 코호르트의 바타비아인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7][18][19] 로마는 게르만 본토에서 모집한 포에데라티로 군단을 보강했고, 브리튼에서도 이러한 관행이 적용되어 용병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무덤이 로마의 묘지에서 확인된다.[24] 로마 군대의 철수와 함께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방어를 위해 모집되면서, 그리고 442년 앵글로색슨족의 첫 번째 반란 기간 동안에도 이주는 계속되었다.[25]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3척 또는 5척의 침략자 함대가 잉글랜드 해안 곳곳에 도착하여 로마 이후 브리튼인들과 싸우고 그들의 땅을 정복하면서 건설되었다.[26] 이주민들의 언어인 고대 영어는 현재 잉글랜드 전역에서 우세하게 되었고, 브리튼 켈트어와 브리튼 라틴어를 대체했다.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도착은 300년에서 700년 사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게르만 민족의 전반적인 이동인 이주 시대(야만인 침략 또는 폴커반데룬으로도 알려짐)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브리튼인들이 아모리카 반도(현대 프랑스브르타뉴노르망디)로 이주했는데, 초기에는 로마 통치 시대인 383년경이었지만, 약 460년과 540년대, 550년대에도 이주가 있었다. 460년대 이주는 약 450년에서 500년 사이에 일어난 앵글로색슨족 반란 중의 싸움에 대한 반응으로 여겨지며, 거의 같은 시기에 브리토니아(현대 갈리시아, 스페인 북서부)로의 이주도 있었다.[27]

역사가 피터 헌터-블레어는 대규모 이주를 제안했는데, 이주민들은 로마 이후 브리튼인들을 몰아내고 섬의 서쪽 끝과 브르타뉴 및 이베리아 반도로 몰아냈다고 한다.[29] 이 견해는 브리튼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영원한 노예 상태"에 놓였다는 베다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한다.[30] 그러나, 하르케에 따르면, 더 현대적인 견해는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의 공존이다.[31][32][33] 그는 이네의 법률에는 브리튼인에 대한 6가지 다른 웨어길드 수준을 규정하는 여러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4가지는 자유민보다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34]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 사회에서 부유한 자유민이 될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앵글로색슨족보다 지위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33][34]

토론 및 분석은 이주 규모와 소규모 엘리트 앵글로색슨족이 와서 국가 운영을 장악했는지, 아니면 브리튼인들을 압도한 대규모 인구 이동이었는지에 대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35][36][37][38] 새롭게 등장하는 견해는 정착의 중심 지역에서는 대규모 이주와 인구 변화가, 주변 지역에서는 엘리트 지배가 동시에 발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39][40][41][42][43][44][45][46]

길다스에 따르면, 초기 활발한 브리튼인들의 저항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라는 인물이 이끌었다.[47] 그 이후로 두 민족 간의 승리는 변동되었다. 길다스는 약 500년 배든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의 "최종" 승리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앵글로색슨족의 이주가 일시적으로 멈춘 시점을 나타낼 수 있다.[16] 길다스는 이 전투가 색슨족의 도착 후 "44년 1개월" 후이자 그의 출생 연도였다고 말했다.[16] 그는 그 후 큰 번영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16]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은 서섹스, 켄트, 이스트앵글리아, 요크셔 일부를 장악했고, 서색슨족은 약 520년 케르딕의 지휘하에 햄프셔에 왕국을 세웠다.[48]

앵글로색슨족이 더 큰 진출을 시작하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48] 그 사이 브리튼인들은 내전, 내분, 일반적인 불안으로 지쳐 있었고, 이것이 길다스의 책 ''브리타니아의 멸망''(브리튼의 멸망)의 영감이 되었다.[49] 브리튼인에 대한 다음 주요 공격은 577년 웨섹스 왕 케올린이 이끌었고, 그의 공격은 시렌체스터, 글로스터, 배스( 디르햄 전투로 알려짐)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48][50][51] 웨섹스의 이러한 확장은 앵글로색슨족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끝났고, 그 결과 케올린은 원래 영토로 후퇴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마 그의 조카였던) 세올로 대체되었다. 케올린은 다음 해에 죽었지만, 연대기는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52][53] 시렌체스터는 그 후 웨섹스가 아닌 머시아의 지배하에 앵글로색슨 왕국이 되었다.[54]

4. 앵글로색슨 왕국의 형성과 발전 (400–600)

앵글로색슨인은 여러 소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일시적으로 한 나라가 다른 소왕국의 반(半)독립을 인정하면서 종주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9세기 초부터 웨식스가 이 종주권을 장악했지만, 다른 소왕국의 독립은 방해하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가 된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3척 또는 5척의 침략자 함대가 잉글랜드 해안 곳곳에 도착하여 로마 이후 브리튼인들과 싸우고 그들의 땅을 정복하면서 건설되었다.[26] 이주민들의 언어인 고대 영어는 현재 잉글랜드 전역에서 우세하게 되었고, 브리튼 켈트어와 브리튼 라틴어를 대체했다.

길다스에 따르면, 초기 브리튼인들의 저항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끌었다.[47] 이후 두 민족 간의 승리는 변동되었다. 길다스는 약 500년 배든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의 "최종" 승리를 기록했으며, 이는 앵글로색슨족의 이주가 일시적으로 멈춘 시점을 나타낸다.[16] 길다스는 이 전투가 색슨족의 도착 후 "44년 1개월" 후이자 그의 출생 연도였다고 말했다.[16] 그는 그 후 큰 번영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16]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은 서섹스, 켄트, 이스트앵글리아, 요크셔 일부를 장악했고, 서색슨족은 약 520년 케르딕의 지휘하에 햄프셔에 왕국을 세웠다.[48]

앵글로색슨족이 더 크게 진출하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48] 그 사이 브리튼인들은 내전, 내분, 불안으로 지쳐 있었고, 이것이 길다스의 책 ''브리타니아의 멸망''의 영감이 되었다.[49]

577년 웨섹스 왕 케올린이 이끈 브리튼인에 대한 다음 주요 공격은 시렌체스터, 글로스터, 배스(디르햄 전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48][50][51] 웨섹스의 이러한 확장은 앵글로색슨족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끝났고, 케올린은 원래 영토로 후퇴했다. 그는 세올로 대체되었다. 케올린은 다음 해에 죽었지만, 연대기는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52][53] 시렌체스터는 웨섹스가 아닌 머시아의 지배하에 앵글로색슨 왕국이 되었다.[54]

4. 1.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정착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게르만족이 브리튼 섬에 침투했다는 기록이 있다.[17] 최초의 게르만족 방문객들은 기원후 43년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이끌었던 최초 침략군에 속한 제14군단에 배속된 8개의 코호르트(부대) 바타비아인들로 추정된다.[17][18][19] 최근에는 로마인들이 브리튼인으로 확인한 일부 토착 부족이 게르만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로마 시대 유물에서 지역 언어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20][21][22]

로마는 게르만 본토에서 모집한 포에데라티로 군단을 보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3] 이러한 관행은 브리튼에서 복무하는 군대에도 적용되었으며, 이 용병들과 그 가족들의 무덤은 당시 로마의 묘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24] 로마 군대가 철수하면서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방어를 위해 모집되었고, 442년 앵글로색슨족의 첫 번째 반란 기간 동안에도 이주는 계속되었다.[25]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3척 또는 5척의 침략자 함대가 잉글랜드 해안 곳곳에 도착하여 로마 이후 브리튼인들과 싸우고 그들의 땅을 정복하면서 건설되었다.[26] 이주민들의 언어인 고대 영어는 향후 수세기 동안 현재 잉글랜드 전역에서 우세하게 되었고, 브리튼 켈트어와 브리튼 라틴어를 대체했다.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도착은 300년에서 700년 사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게르만 민족의 전반적인 이동인 이주 시대(야만인 침략 또는 폴커반데룬으로도 알려짐)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브리튼인들이 아모리카 반도(현대 프랑스브르타뉴노르망디)로 이주했는데, 초기에는 로마 통치 시대인 383년경이었지만, 약 460년과 540년대, 550년대에도 이주가 있었다. 460년대 이주는 약 450년에서 500년 사이에 일어난 앵글로색슨족 반란 중의 싸움에 대한 반응으로 여겨지며, 거의 같은 시기에 브리토니아(현대 갈리시아, 스페인 북서부)로의 이주도 있었다.[27]

역사가 피터 헌터-블레어는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도착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제시했다.[28] 그는 대규모 이주를 제안했는데, 이주민들은 로마 이후 브리튼인들을 몰아내고 섬의 서쪽 끝과 브르타뉴 및 이베리아 반도로 몰아냈다고 한다.[29] 이 견해는 브리튼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영원한 노예 상태"에 놓였다는 베다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한다.[30]

하르케에 따르면, 더 현대적인 견해는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의 공존이다.[31][32][33] 그는 여러 현대 고고학자들이 전통적인 모델을 재평가하고, 주로 이네의 법률을 기반으로 한 공존 모델을 개발했다고 제안한다. 이 법률에는 브리튼인에 대한 6가지 다른 웨어길드 수준을 규정하는 여러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4가지는 자유민보다 낮다.[34]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 사회에서 부유한 자유민이 될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앵글로색슨족보다 지위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33][34]

토론 및 분석은 이주 규모와 소규모 엘리트 앵글로색슨족이 와서 국가 운영을 장악했는지, 아니면 브리튼인들을 압도한 대규모 인구 이동이었는지에 대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35][36][37][38] 새롭게 등장하는 견해는 정착의 중심 지역에서는 대규모 이주와 인구 변화가, 주변 지역에서는 엘리트 지배가 동시에 발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39][40][41][42][43][44][45][46]

길다스에 따르면, 초기 활발한 브리튼인들의 저항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라는 인물이 이끌었다.[47] 그 이후로 두 민족 간의 승리는 변동되었다. 길다스는 약 500년 배든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의 "최종" 승리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앵글로색슨족의 이주가 일시적으로 멈춘 시점을 나타낼 수 있다.[16] 길다스는 이 전투가 색슨족의 도착 후 "44년 1개월" 후이자 그의 출생 연도였다고 말했다.[16] 그는 그 후 큰 번영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16] 그러나, 잠잠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앵글로색슨족은 서섹스, 켄트, 이스트앵글리아, 요크셔 일부를 장악했고, 서색슨족은 약 520년 케르딕의 지휘하에 햄프셔에 왕국을 세웠다.[48]

앵글로색슨족이 더 큰 진출을 시작하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48] 그 사이 브리튼인들은 내전, 내분, 일반적인 불안으로 지쳐 있었고, 이것이 길다스의 책 ''브리타니아의 멸망''(브리튼의 멸망)의 영감이 되었다.[49]

브리튼인에 대한 다음 주요 공격은 577년 웨섹스 왕 케올린이 이끌었고, 그의 공격은 시렌체스터, 글로스터, 배스(디르햄 전투로 알려짐)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48][50][51] 웨섹스의 이러한 확장은 앵글로색슨족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끝났고, 그 결과 케올린은 원래 영토로 후퇴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마 그의 조카였던) 세올로 대체되었다. 케올린은 다음 해에 죽었지만, 연대기는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52][53] 시렌체스터는 그 후 웨섹스가 아닌 머시아의 지배하에 앵글로색슨 왕국이 되었다.[54]

4. 2. 칠왕국 시대와 소왕국

헌팅던의 헨리가 고안한 칠왕국 시대는 5세기 브리튼의 로마 지배 종식부터 829년 웨섹스의 에그베르트가 앵글로색슨 왕국 대부분을 지배하게 될 때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가리킨다.[55] 이 시기는 초기 중세 또는 암흑기로 불리기도 한다.[56] '칠왕국'이라는 명칭은 편의상 사용되는 것으로, 7개의 왕국이 명확하고 안정적으로 존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기간 동안 왕국과 소왕국의 수는 경쟁하는 왕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급격하게 변동했다.[56]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주요 4대 왕국이스트앵글리아, 머시아, 노섬브리아 (원래 베르니시아와 데이라 두 왕국), 웨섹스였다. 소규모 왕국으로는 에섹스, 켄트, 서섹스가 있었다.[56]

앵글로색슨 정착 이후 서기 600년경 남부 브리튼, 여러 소왕국으로의 분할을 보여줌


서기 800년경 앵글로색슨 및 브리튼 왕국들


노섬브리아의 알드프리드 (686~705)의 은화. 앞면: +AldFRIdUS, 소환-환형; 뒷면: 왼쪽으로 서 있는 갈라진 꼬리 사자


6세기 말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는 켄트의 에델베르트였으며, 그의 영토는 험버 강까지 북쪽으로 확장되었다.[57] 7세기 초에는 켄트와 이스트앵글리아가 주요 왕국이었다.[58] 616년 에델베르트 사망 후, 이스트앵글리아의 레드월드가 험버 강 남쪽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다.[58] 노섬브리아의 에델프리드 사망 후, 레드월드는 에드윈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통일된 노섬브리아 왕국에서 데이라와 베르니시아의 두 왕조를 장악하도록 도왔다.[58] 이후 에드윈은 노섬브리아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58]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의 세력 증가는 펜다 지휘하의 앵글로색슨 머시아인들을 그위네드의 웨일스 왕 카드월론 압 카드판과 동맹을 맺도록 강요했고, 그들은 함께 에드윈의 영토를 침략하여 633년 해틀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죽였다.[59][60] 그러나 오스왈드가 헥삼 근처 헤븐필드에서 카드월론을 패배시키고 죽이면서 그들의 성공은 단명했다.[61] 10년도 채 되지 않아 펜다는 다시 노섬브리아에 전쟁을 일으켜 642년 마서필드 전투에서 오스왈드를 죽였다.[62] 오스왈드의 형제인 오스위우는 왕국의 북쪽 끝까지 쫓겨났으나,[62][63] 곧 펜다를 죽였고, 머시아는 7세기 후반과 8세기 전체를 파위스의 웨일스 왕국과 싸우는 데 보냈다.[62] 이 전쟁은 오파의 머시아 통치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으며, 그는 웨일스/잉글랜드 국경을 형성한 150마일 길이의 도랑 건설로 기억된다.[64] 머시아의 우세는 825년 엘렌던 전투에서 베오른울프가 웨섹스의 에그베르트에게 완전히 패배하면서 끝났다.[65]

부족 토지 면적 목록과 같은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소규모 왕국과 영토들이 언급되어 있다.

  • 헤이스팅가스
  • 휘체
  • 아이클링가스 왕국, 머시아의 전신 국가
  • 와이트 섬 (위트와라)
  • 린지
  • 마고네사테
  • 메온와라, 햄프셔의 메온 계곡 지역
  • 펙세테
  • 서리
  • 톰세테
  • 레오켄세테

5.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화 (7세기-8세기)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화는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은 크게 켈트 교회와 로마 교회의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성 패트릭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아일랜드는 콜룸바가 아이오나에 종교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앵글로색슨족 개종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린디스펀의 에이단은 아이오나에서 파견되어 635년부터 651년까지 노섬브리아의 린디스펀에 주교좌를 설립하여 켈트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한편,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켄트에 파견하여 앵글로색슨족을 로마 교회 방식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트 왕 에셀베르트의 지원을 받아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설립하고, 601년에는 에셀베르트 왕을 세례받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켈트 교회와 로마 교회의 의식 차이(부활절 날짜, 수도사 머리 모양 등)는 갈등을 야기했고, 결국 664년 휘트비 공의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성 윌프리드가 옹호한 로마 교회 방식이 채택되면서 켈트 교회는 쇠퇴하고, 로마 교회가 잉글랜드 교회의 주류가 되었다.

5. 1. 초기 기독교 전래

로마 제국 점령기 동안 기독교가 영국 제도에 전래되었다.[66] 3세기에 활동한 초기 기독교 베르베르 작가 터툴리아누스는 "기독교가 영국에서도 발견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67]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306–337)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허용했다.[68]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 통치 기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69]

에스컴 교회, 7세기 앵글로색슨 교회의 복원 건물. 교회 건축과 유물은 유용한 역사적 정보의 원천을 제공한다.


앵글로색슨 이교도들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많은 브리튼인이 기독교 신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70][71] 431년 켈레스티누스 1세 교황이 아일랜드인들을 개종시키려고 시도했었다.[72]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을 대규모로 개종시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성 패트릭이다.[72] 그 후 기독교화된 아일랜드는 영국 제도의 나머지 지역을 개종시키기 시작했고, 콜룸바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아이오나에 종교 공동체를 설립했다.[73] 에이단이 아이오나에서 파견되어 635년에서 651년 사이에 노섬브리아의 린디스펀에 주교좌를 설립했다.[74] 따라서 노섬브리아는 켈트(아일랜드) 교회에 의해 개종되었다.[74]

베다는 토착 브리튼 성직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그의 ''교회사''에서 그들의 "말할 수 없는 죄악"을 비난하고, 그들이 앵글족이나 색슨족에게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고 불평한다.[75]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597년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하여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려 했지만, 베다는 브리튼 성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명을 돕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76][77] 베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브리튼인들이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78] 597년 영국 남동부에 도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트의 에셀베르트 왕으로부터 교회를 짓기 위한 토지를 받았다. 597년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짓고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설립했다.[79] 에셀베르트는 601년까지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영국인을 개종시키는 자신의 사명을 계속했다.[80] 영국의 대부분의 북부와 동부는 이미 아일랜드 교회에 의해 복음화되었다. 그러나 서섹스와 와이트섬은 성 윌프리드가 도착할 때까지 주로 이교도로 남아 있었는데, 망명한 요크 대주교인 그는 약 681년에 서섹스를, 683년에 와이트섬을 개종시켰다.[81][82][83]

휘트비 수도원


"개종"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교회 저술가들은 지역 왕이 세례를 받는 것에 동의하기만 하면, 그가 실제로 기독교 관습을 채택했는지 여부와 그의 왕국의 일반 대중이 그렇게 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단순히 지역을 "개종"되었다고 선언하는 경향이 있었다.[84] 교회가 지어질 때, 이교도와 기독교 상징을 모두 포함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이미 개종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 앵글로색슨족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증명한다.[85][86]

앵글로색슨 왕국 전체에 기독교가 설립된 후에도, 특히 부활절 날짜와 수도사들의 머리카락 자르는 방식을 두고 로마 의식과 아일랜드 의식의 추종자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87] 664년,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휘트비 수도원에서 회의(휘트비 시노드)가 열렸다. 성 윌프리드는 로마 의식을 옹호했고 콜먼 주교는 아일랜드 의식을 옹호했다.[88] 윌프리드의 주장이 승리했고, 콜먼과 그의 일행은 격렬한 실망 속에 아일랜드로 돌아갔다.[88] 로마 의식은 영국 교회에 의해 채택되었지만,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12세기에 아일랜드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로마 의식을 부과할 때까지 아일랜드 교회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8][89]

5. 2. 앵글로색슨족의 개종

영국 제도에는 로마 점령기 동안 기독교가 전래되었다.[66] 3세기 베르베르 작가 터툴리아누스는 "기독교가 영국에서도 발견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67] 콘스탄티누스 황제(306–337)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식 허용했고,[68] 테오도시우스 대제 황제(379–395) 통치 기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69]

앵글로색슨 이교도들이 도착했을 때 브리튼인들의 기독교 신자 수는 확실하지 않다.[70][71] 431년 켈레스티누스 1세 교황은 아일랜드인들을 개종시키려 했지만,[72]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인들을 대규모로 개종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72] 이후 기독교화된 아일랜드는 콜룸바가 스코틀랜드 서해안 아이오나에 종교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영국 제도 나머지 지역을 개종시키기 시작했다.[73] 에이단은 635년에서 651년 사이에 노섬브리아 린디스펀에 주교좌를 설립했고,[74] 노섬브리아는 켈트(아일랜드) 교회에 의해 개종되었다.[74]

베다는 토착 브리튼 성직자들의 "말할 수 없는 죄악"을 비난하고, 앵글족이나 색슨족에게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고 불평한다.[75]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597년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하여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려 했지만, 베다는 브리튼 성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명을 돕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76][77] 베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브리튼인들이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78] 597년 영국 남동부에 도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트의 에셀베르트 왕으로부터 교회를 짓기 위한 토지를 받았고,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설립했다.[79] 에셀베르트는 601년까지 세례를 받았고, 영국인을 개종시키는 자신의 사명을 계속했다.[80] 영국의 대부분의 북부와 동부는 이미 아일랜드 교회에 의해 복음화되었다. 그러나 서섹스와 와이트섬은 성 윌프리드가 도착할 때까지 주로 이교도로 남아 있었는데, 그는 각각 681년과 683년에 이 지역들을 개종시켰다.[81][82][83]

교회 저술가들은 지역 왕이 세례를 받는 것에 동의하기만 하면, 그가 실제로 기독교 관습을 채택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단순히 지역을 "개종"되었다고 선언하는 경향이 있었다.[84] 교회가 지어질 때, 이교도와 기독교 상징을 모두 포함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이미 개종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 앵글로색슨족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증명한다.[85][86]

앵글로색슨 왕국 전체에 기독교가 설립된 후에도, 부활절 날짜와 수도사들의 머리카락 자르는 방식을 두고 로마 의식과 아일랜드 의식의 추종자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87] 664년, 휘트비 시노드가 휘트비 수도원에서 열렸다. 성 윌프리드는 로마 의식을 옹호했고 콜먼 주교는 아일랜드 의식을 옹호했다.[88] 윌프리드의 주장이 승리했고, 콜먼과 그의 일행은 아일랜드로 돌아갔다.[88] 로마 의식은 영국 교회에 의해 채택되었지만,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12세기에 아일랜드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로마 의식을 부과할 때까지 아일랜드 교회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8][89]

6. 바이킹의 침략과 웨섹스 왕국의 부상 (9세기)

9세기 초, 웨식스 왕국이 앵글로색슨 소왕국들에 대한 종주권을 장악했지만, 각 소왕국의 독립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데인인의 침입이 격화되면서 웨섹스를 제외한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멸망했다. 템스 강 이북의 데인로를 중심으로 하는 데인인들과 잉글랜드 서남부의 웨섹스 왕국이 대립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웨섹스가 열세였으나 앨프레드 대왕 이후 앵글로색슨족은 공세로 전환하여 점차 데인인 지역을 회복했다. 애설스턴 왕은 최초로 전 잉글랜드 왕으로 칭해졌으며, 에드거 왕은 데인로 지역 데인인에게 자치를 인정하는 대신 잉글랜드 왕국의 일원임을 서약하게 하여 앵글로색슨인과 데인인의 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의 습격이 다시 격화되었고, 1066년 노르만 정복을 거쳐 오늘날 잉글랜드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878년 잉글랜드 지도: 데인로의 영역



6. 1. 바이킹의 초기 침략

8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스칸디나비아, 주로 덴마크노르웨이 출신의 약탈자와 식민 개척자들이 영국 제도를 포함한 서유럽을 약탈했다.[90] 이들은 ''바이킹''으로 알려졌는데, 이 명칭은 바이킹의 기원지인 스칸디나비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91][92] 영국 제도에서 최초의 약탈은 8세기 후반에 주로 교회와 수도원(부의 중심지로 여겨짐)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91][93]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793년 성스러운 섬 린디스펀이 약탈당했다는 기록이 있다.[94] 이후 약탈은 약 40년간 거의 중단되었으나, 835년경부터 더욱 빈번해졌다.[95]

6. 2. 알프레드 대왕과 웨섹스 왕국

8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들이 서유럽을 약탈했다.[90] 860년대 덴마크인들은 전면적인 침략을 시작했고, 10년 안에 거의 모든 앵글로색슨 왕국이 함락되었다. 웨섹스 왕국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95]

878년 3월, 웨섹스의 왕 알프레드 대왕은 에델니에 요새를 건설하고 바이킹에 대항하는 기지로 삼았다.[97] 878년 5월, 알프레드는 에딩턴 전투에서 바이킹 군대를 물리쳤고, 바이킹 지도자 구드룸은 항복하고 세례를 받기로 했다.[97] 이후 웨드모어 조약과 알프레드와 구드룸의 조약을 통해 덴마크인들이 통치할 데인로 지역과 웨섹스의 경계가 정해졌다.[99] 웨섹스는 남쪽 전체를 통치했고, 덴마크인들은 이스트앵글리아와 북쪽을 통치했다.[100]

에딩턴 전투 승리 이후, 알프레드는 왕국을 상시 전쟁 체제로 변모시켰다.[101] 그는 해군을 건설하고, 군대를 재편성하고, 버러라는 요새 도시 시스템을 구축했다. 버럴 하이데이지라는 조세 제도를 통해 버러와 상비군을 유지했다.[102] 버러는 방어 구조물이자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105] 891년 새로운 덴마크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3년 후 알프레드의 방어 시스템으로 인해 덴마크인들은 포기하고 해산했다.[108]

알프레드는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편찬하게 하고, 여러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수정하는 등 문학과 교육에도 힘썼다.[109]

7. 잉글랜드의 통일 (10세기)

9세기 초, 웨섹스는 앵글로색슨 소왕국들 사이에서 종주권을 장악했지만, 다른 소왕국들의 독립은 인정했다. 그러나 데인인의 침입으로 웨섹스를 제외한 앵글로색슨 왕국들이 멸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템스강 이북의 데인로를 중심으로 하는 데인인과 잉글랜드 서남부의 웨섹스 왕국이 대립하게 되었다. 앨프레드 대왕 이후 앵글로색슨족은 점차 데인인 지역을 회복했고, 애설스탠 왕 때 최초로 전 잉글랜드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에드가 왕은 데인로 지방의 데인인에게 자치를 인정하면서도 잉글랜드 왕국의 일원임을 서약하게 하여 앵글로색슨인과 데인인의 융합을 이끌었다.

7. 1. 웨섹스 왕가의 잉글랜드 통일

874년부터 879년까지 머시아 서부는 케올울프 2세가 통치했고, 그 뒤를 이어 에텔레드가 머시아의 영주가 되었다.[111] 알프레드 대왕은 886년경부터 자신을 앵글로색슨의 왕이라고 칭했고, 886/887년에 에텔레드는 알프레드의 딸 에텔플래드와 결혼했다.[111] 899년 알프레드가 죽자 그의 아들 에드워드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112]

911년 에텔레드가 죽자 에텔플래드가 "머시아의 여왕"으로 그를 계승했고,[111] 910년대에 그녀와 그의 오빠 에드워드는 바이킹의 지배에서 이스트앵글리아와 머시아 동부를 탈환했다.[111] 에드워드와 그의 후계자들은 알프레드가 구축한 요새화된 부르(burh) 네트워크를 확장했는데, 이는 그들의 전략의 핵심 요소였으며 공세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114][113] 에드워드는 924년 죽었을 때 험버 강 이남의 모든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의 아들 에텔스탄은 927년 노섬브리아를 합병하여 최초로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되었다. 937년 브루난부르 전투에서 그는 스코틀랜드인, 덴마크인, 바이킹, 스트래스클라이드 브리튼인의 연합군을 물리쳤다.[114]

브리튼인과 정착한 덴마크인들과 함께 다른 앵글로색슨 왕국들 중 일부는 웨섹스의 지배를 싫어했다. 따라서 웨섹스 왕의 죽음은 반란, 특히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을 야기했다.[114] 959년 왕위에 오른 알프레드의 증손자 에드가는 973년 배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그 직후 다른 브리튼 왕들이 체스터에서 그를 만나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115]

에드가의 주화


데인로(Danelaw)에 덴마크인과 노르웨이인 정착민들이 존재했던 것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곳 사람들은 정착 100년 후에도 자신들을 "군대"로 여겼다.[116] 에드가 왕은 962년 노섬브리아 사람들을 포함하는 법전을 발표했는데, 그는 그것을 올락 백작 "그리고 그 백작령에 사는 모든 군대"에게 전달했다.[116]

7. 2. 덴로 지역의 영향

데인로(Danelaw)에 덴마크인과 노르웨이인 정착민들이 존재한 것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곳 사람들은 정착 100년 후에도 자신들을 "군대"로 여겼다.[116] 에드가 왕은 962년 노섬브리아 사람들을 포함하는 법전을 발표했는데, 그는 그것을 올락 백작 "그리고 그 백작령에 사는 모든 군대"에게 전달했다.[116] 현대 영어에는 스칸디나비아어 어원을 가진 단어가 3,000개가 넘으며,[117][118] 잉글랜드에는 1,500개가 넘는 지명이 스칸디나비아 어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노퍽주 하우와 노스요크셔주 하우와 같은 지형 이름은 언덕, 작은 언덕 또는 봉분을 의미하는 고대 노르드어 단어 ''haugr''에서 유래했다.[118][119] 고고학 및 기타 학문적 맥락에서 "앵글로-스칸디나비아"라는 용어는 종종 잉글랜드의 스칸디나비아 문화에 사용된다.

8. 덴마크 왕조의 잉글랜드 지배와 노르만 정복 (978–1066)

10세기 말부터 덴마크의 바이킹들은 잉글랜드를 다시 침략하기 시작했다. 991년 몰든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가 패배한 후, 잉글랜드는 덴마크인들에게 데인겔드(Danegeld)라는 세금을 바쳐야 했다.

에드먼드는 아버지 에텔레드와 불화를 겪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1016년 에텔레드가 사망하고 에드먼드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애싱던 전투에서 크누트가 이끄는 덴마크군에게 패배했다. 크누트와 에드먼드는 잉글랜드를 분할하여 통치하기로 합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먼드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고, 잉글랜드 의회(위탄)는 크누트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했다.[134]

크누트는 잉글랜드를 백작령으로 나누어 통치했으며, 잉글랜드인인 고드윈을 웨섹스 백작으로 임명하는 등 잉글랜드 귀족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에텔레드의 미망인 에마와 결혼하여 왕위 계승권을 강화했다.[137] 1018년에는 덴마크 왕위를, 1020년에는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하며 북해 제국을 건설했다.[139]

8. 1. 에텔레드 2세와 덴마크의 재침략

켄트주 램스게이트의 바이킹 롱쉽 복제품


에드워드가 이복형제의 신하들에 의해 암살당한 후, 에텔레드가 왕위를 계승했다.[120] 38년간의 통치는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통치 기간 중 하나였지만, 그는 무능한 왕이었기에 "무준비왕 에텔레드"라는 별명을 얻었다.[121] 윌리엄 몰므즈베리는 에텔레드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그가 왕국을 다스리기보다는 점유했다고 말했다.[122]

에텔레드가 왕위에 오를 무렵, 덴마크의 하랄 고름손은 그의 영토에 기독교를 강요하려 했다.[123] 그의 많은 신하들은 이러한 생각을 좋아하지 않았고, 988년 이전에 그의 아들 스베인 포크비어드가 아버지를 왕국에서 몰아냈다. 국내에서 쫓겨난 반란군들은 아마도 영국 해안을 습격하는 최초의 물결을 형성했을 것이다.[123] 반란군들이 습격에서 성공하자 덴마크 왕들은 직접 이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124]

991년 바이킹들은 이프스위치를 약탈했고, 그들의 함대는 에섹스주 몰든 근처에 상륙했다.[124] 덴마크인들은 영국인들에게 몸값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 지휘관 비르트노스는 거절했다. 그는 그 후에 일어난 몰든 전투에서 전사했고, 영국군은 쉽게 패배했다.[124] 그때부터 바이킹들은 마음대로 어디든 습격한 것 같다. 그들은 영국인들의 저항 부족을 무시했다. 심지어 알프레드 시대의 버르 시스템도 실패했다.[125] 에텔레드는 습격자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숨어 있었던 것 같다.[125]

980년대 웨섹스의 왕들은 왕국의 화폐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당시 전국에 약 300명의 주화 제조인과 60개의 주조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126] 5년 또는 6년마다 유통되던 화폐는 법정 통화의 지위를 상실하고 새로운 주화가 발행되었다.[126] 전국적으로 통화를 관리하는 시스템은 매우 정교했으며, 이를 통해 왕은 필요할 경우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127][128] 몰든 전투 이후, 에텔레드는 싸우는 대신 Danegeld로 알려진 방식으로 덴마크인들에게 몸값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129] 몸값의 일환으로 급습을 막기 위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덴마크 세금 지불은 바이킹들을 매수하는 대신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부추기기만 했다.[130]

노르망디 공작들은 덴마크 모험가들이 영국 해안을 급습하는 데 그들의 항구를 사용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했다. 그 결과 영국과 노르망디의 궁정은 서로에게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했다.[123] 결국 에텔레드는 노르망디와 조약을 맺고 1002년 봄에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1세의 딸인 에마와 결혼했다. 이는 급습자와 노르망디 간의 연계를 끊으려는 시도로 여겨졌다.[125][131]

1002년 11월 성 브리스의 날, 에텔레드의 명령에 따라 영국에 살고 있던 덴마크인들이 학살당했다.[132]

8. 2. 크누트 대왕의 통치

카누트의 영토


1013년 중반, 덴마크의 국왕 스벤 포크비어드는 덴마크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켄트의 샌드위치에 도착했다.[133] 그는 다넬로로 북상했고, 현지 주민들은 즉시 그를 지지했다.[133] 이후 스벤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에텔레드를 노르망디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1013~1014). 그러나 1014년 2월 3일, 스벤은 갑자기 사망했다.[133] 에텔레드는 스벤의 죽음을 틈타 잉글랜드로 돌아와 그의 아들인 카누트를 덴마크로 몰아냈고, 이 과정에서 카누트는 동맹을 포기해야 했다.[133]

1015년, 카누트는 잉글랜드에 대한 새로운 원정을 시작했다.[133] 에드먼드는 아버지 에텔레드와 불화를 겪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134] 일부 잉글랜드 지도자들은 카누트를 지지했고, 에텔레드는 결국 런던으로 후퇴했다.[134] 덴마크 군대와 교전하기 전에 에텔레드는 사망했고 에드먼드가 왕위를 계승했다.[134] 덴마크 군대는 런던을 포위했지만, 에드먼드는 탈출하여 충성스러운 군대를 모았다.[134] 에드먼드의 군대는 덴마크군을 격파했지만, 이 성공은 짧았다. 애싱던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승리했고 많은 잉글랜드 지도자들이 사망했다.[134] 카누트와 에드먼드는 왕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고, 에드먼드는 웨섹스를, 카누트는 나머지를 통치하게 되었다.[134][135]

1017년, 에드먼드는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카누트나 그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잉글랜드 의회(위탄)는 카누트를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했다.[134] 카누트는 잉글랜드를 여러 백작령으로 나누었다. 대부분은 덴마크 혈통의 귀족들에게 할당되었지만, 그는 잉글랜드인인 고드윈을 웨섹스 백작으로 임명했다. 고드윈은 결국 왕의 처형과 결혼하면서 왕실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136] 1017년 여름, 카누트는 에텔레드의 미망인인 에마와 결혼했다.[137] 에마는 그들의 결합으로 태어난 자녀에게만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결혼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138] 카누트는 이미 노샘프턴의 엘프기푸라는 아내가 있었고, 그녀는 그에게 스베인과 하롤드 헤어풋 두 아들을 낳았다.[138] 그러나 교회는 엘프기푸를 카누트의 아내가 아닌 정부로 여겼던 것 같다.[138] 엘프기푸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외에도, 그는 에마와의 사이에서 하르타카누트라는 또 다른 아들을 두었다.[138][139]

카누트의 형제인 덴마크의 하랄드 2세가 1018년에 사망하자, 카누트는 덴마크 왕국을 확보하기 위해 덴마크로 갔다.[139] 2년 후, 카누트는 노르웨이를 지배하에 두었고, 엘프기푸와 그의 아들 스베인에게 통치를 맡겼다.[139]

8. 3. 노르만 정복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분. 헤롤드(오른쪽 아래)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죽는 장면을 보여준다


1066년 에드워드 참회왕이 사망하고 후계자 문제로 해럴드가 왕위에 올랐지만,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등 다른 왕위 주장자들이 나타났다.[151] 윌리엄은 에드워드 참회왕의 친척으로,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왕위를 약속했다고 주장했다.[141]

한편, 노르웨이 왕 하랄드 하르드라다 역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와 연합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했다.[151] 해럴드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하랄드 하르드라다와 토스티그를 격파했지만,[159]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 군대가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했다.[160]

해럴드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의 군대와 맞섰으나, 1066년 10월 14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162] 헤이스팅스 전투는 앵글로색슨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고,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164]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10년이 걸렸으며, 이 과정에서 저항 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특히 "북부 약탈"로 알려진 사건에서는 북부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으로 몰아넣었다.[165] 앵글로색슨 족의 토지는 몰수되었고, 앵글로색슨 양식의 건축물은 대부분 노르만 양식으로 대체되었다.[1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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